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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Hour

The Artist of the Week : Roy Lichtenstein

2012-07-11


IN COLUMBUS, OHIO, C. 1949. PHOTOGRAPHER UNKNOWN. THE ROY LICHTENSTEIN FOUNDATION ARCHIVES.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포스트 모더니스트이자 팝 아티스트로 (어느 작가와는 다르게) 마를린 먼로나 수프캔 그림이 아닌 프린트에 집중한 작가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거대한 크기로 재해석된 만화 작품으로 유명하지요. 미국의 미술대학인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의 첫 번째 회고전인 ‘Roy Lichtenstein: A Restospective’ 를 진행합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 160여개의 콜렉션을 포함하고 있고 곧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와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퐁피듀 센터(Centre Pompidou)로 이동한다고 하는데요. 금주에는 앤디 워홀(Andy Warhol), 키스 해링(Keith Haring)과 함께 팝아트의 대표적인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LICHTENSTEIN IN FRONT OF DROWNING GIRL AT THE 33RD VENICE BIENNALE, U.S. PAVILION, IN 1966. THE ROY LICHTENSTEIN FOUNDATION ARCHIVES. DROWNING GIRL, 1963. © ESTATE OF ROY LICHTENSTEIN.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PHILIP JOHNSON FUND (BY EXCHANGE) AND GIFT OF MR. AND MRS. BAGLEY WRIGHT, 1971.

리히텐슈타인은 1923년 뉴욕의 중상류층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밀턴은 부동산 중개인이었죠. 어린시절 예술과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열렬한 재즈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종종 할렘의 아폴로 씨어터(Apollo Theater)에 공연을 보러가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그는 종종 뮤지션이 연주를 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자랐지요. 뉴욕의 프랭클린 스쿨(Franklin School for Boys)을 졸업한 뒤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의 수업을 들으며 회화작가였던 레지널드 마쉬(Reginald Marsh)의 아래에서 일을 하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워갑니다.


LICHTENSTEIN, AGE 11, AT LAKE BUEL, IN MASSACHUSETTS, 1933. PHOTOGRAPHER UNKNOWN. THE ROY LICHTENSTEIN FOUNDATION ARCHIVES.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그 후 곧 뉴욕을 떠나 오하이오 주립대(Ohio State University)에 입학, 미술을 공부하게 되는데요. 세계 2차 대전으로 3년간 군대생활을 한 후 오하이오로 복귀한 그는 후에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호잇 L. 셔먼(Hoyt L. Sherman)의 아래에서 공부를 재게합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그는 1951년 뉴욕의 카를바흐 갤러리(Carlebach Gallery)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게 됩니다. 이후 클리블랜드로 이주하여 윈도우 데코레이터, 데생화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조금씩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 당시의 그의 작품들은 큐비즘(Cubism, 종래 원근 법칙의 기본 원리는 포기하면서 동일한 사물의 서로 다른 측면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회화 운동), 표현주의(Expressionism, 예술을 주관적 현실의 확장으로서 창조하려 했던 경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던 시기였지요. 1957년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형식적으로 추상적이면서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인 회화의 한 양식)으로 자신의 경향이 이동하게 되고 이는 곧 이후의 회화 스타일에서 표현되게 됩니다.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Look Mickey, 1961. Oil on canvas. 121.9 x 175.3 cm (48 x 69 in). © National Gallery of Art. The National Gallery of Art. Dorothy and Roy Lichtenstein, Gift of the artist, in Honor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National Gallery.

1960년 리히텐슈타인은 러트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같은 대학의 강사로 있던 앨런 카프로(Allan Kaprow)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요. 이 시기부터 다시금 팝아트 경향의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죠. 그리고 드디어 1961년 만화 이미지와 광고 프린트의 형식을 사용한 첫번째 팝 페인팅을 만들게 되는데요. 큰 스케일의 만화 인물과 색을 점으로 분할하여 찍어내는 벤데이닷(Ben-Day Dot)을 이용한 첫번째 팝아트 작품은 1961년에 만든 ‘이것 좀 봐 미키(Look Mickey)’라는 작품입니다. 재밌는건 이 작품은 그의 아들이 미키 마우스 만화책을 가르키며 “아빠는 저 그림처럼 잘 못그리지?”라고 했던 말에 자극을 받고 만들게 되었다는 점인데요. 이후의 비슷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곧 예술계에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패턴은 1965년까지 이어지면서 광고 이미지를 이용하여 소비지상주의와 가사노동에 관한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 비슷한 해에 껌 포장지와 만화속의 캐릭터를 이용한 6개의 작품을 더 내놓게 되는 것도 이런 패턴의 연속선상에 있었던 것이죠.

여기서 등장하는 ‘팝아트’는 60년대 미국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덕으로 자리잡는 소비문화로 인해 ‘구매촉진’위해 쏟아져 나온 상품광고와 자극적인 매체들이 대중문화를 이루고 이것이 한때 고상하게 자리잡고 있던 미술과 결합하면서 생겨나게 된 것이었는데요. 당시 자본주의의 폐해를 공격하고 비판하던 기존 미술작가들의 태도와는 다르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포용하는 팝 아티스트들이 각광을 받게 되면서 점점 그 영향력을 넓혀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1961년 미술작품딜러였던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는 그의 갤러리에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전시하고 1962년 개인 전시이후 영향력있는 콜렉터가 모든 콜렉션을 구입하게 됩니다. 이후 1963년까지 그는 스니커, 핫도그 그리고 골프공과 같은 개인의 일상품들에 주로 집중하여 작품을 만들게 되지요.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Keds, 1961. Oil on canvas. 123.2 x 88.3 cm (48.5 x 34.75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The Robert B. Mayer Family Collection, Chicago, Illinois, USA.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The Ring (Engagement), 1962. Oil on canvas. 121.9 x 177.8 cm (48 x 70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Stefan T. Edlis Collection.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Masterpiece, 1962. Oil on canvas. 137.2 x 137.2 cm (54 x 54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Agnes Gund Collection, New York.


Drowning Girl by Roy Lichtenstein, 1963. Roy Lichtenstein used the splash page of a romance story in DC Comics’ Secret Hearts #83 (November 1962), lettered by Ira Schnapp, as the basis for the image. http://www.lichtensteinfoundation.org/

1964년 러트거스 대학을 그만둔 그는 뉴욕에서 본격적인 예술활동에 매진하게 되는데요. 유화물감과 아크릴물감의 일종인 마그나 페인트(Magna paint)를 이용한 유명한 그림 ‘익사하는 여자(Drowning Girl, 1963)’도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었죠. 이 작품은 디시 코믹스의 만화 ‘시크릿 하드 83편’ 중 한 장면에서 따온 것이었는데요. 이 그림 역시 리히텐슈타인 만의 독특한 스타일인 두꺼운 선과 볼드한 컬러, 그리고 벤데이도트를 이용한 작품이었죠. 작품에 대해 리히텐슈타인은 “(추상표현주의들은) 스트로크를 캔버스에 그리고 컬러포지션과 사이즈에 대응합니다. 내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게 보이지만 선을 그리고 배치하는 방식은 거의 같습니다. 저의 것은 잭슨 폴락이나 프란츠 클라인(미국의 화가)의 작품처럼 캘리그래픽으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지요.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Oh, Jeff…I Love You, Too…But…, 1964. Oil and Magna on canvas. 121.9 x 121.9 cm (48 x 48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Collection Simonyi.


OHHH…ALRIGHT…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Ohhh…Alright…, 1964. Oil and Magna on canvas. 91.4 x 96.5 cm (36 x 38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Private Collection.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가 재생산되는 대신, 대중메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방식과 싸워야 했는데요. 리히텐슈타인은 너무 진지하게는 생각하지는 않는대신 그는 “저는 저의 작품이 만화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변신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작품이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예술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미술평론가들은 그 작품의 독창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저속하거나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심하게 비판받았었죠. 1964년 라이프 매거진은 리히텐슈타인에 대한 기사 제목을 “그는 미국 최악의 아티스트인가?(Is He the Worst Artist in the U.S.?”라고 뽑을 정도 였으니까요. 그는 그러한 비평들에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죠. “제 작품이 오리지널에 가까워 질수록, 내용에 대한 비판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제 작품은 완전히 변형되었고 저의 목적과 인식은 전혀 다른것 입니다. 제 생각에 제 그림들은 아주 많이 변형이 되었지요. 하지만 어떤 이성적인 논쟁으로도 설명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라고 말이죠. 그는 또한 1986년 한 인터뷰에서 “저는 제가 실제로 그림을 그럴때 제가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이것이 비평이 의아한 이유인 것이지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Whaam!, 1963. Magna and oil on canvas. 172.7 x 406.4 cm (68 x 160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Tate: Purchased 1966. Photo ©Tate, 2011.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Sunrise, 1965. Oil and Magna on canvas. 91.4 x 172.7 cm (36 x 68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Private Collection.

리히텐슈타인의 당시 작품들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바로 로맨스와 전쟁이었죠. 사실 로맨스나 전쟁물은 대게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맥락없이 단 한 장면만 보여주더라도 보는 이는 앞뒤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행복한 눈물(Happy Tears, 1964)” 이나 “꽝!(Whaam)” 과 같은 작품을 보면 알수 있듯이 말이죠.

팝아트의 가장 초기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꽝!(Whaam!)”은 1962년 DC 코믹스의 만화책에서 따온 것이었는데요. 그림은 비행기 조종사가 적 비행기를 격추시키고 “꽝!(Whaam!)”이라는 의성어와 함께 “나는 사격버튼을 눌렀고… 그리고 내 앞에 로켓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불타올랐다…(I pressed the fire control… and ahead of me rockets blazed through the sky…”라는 캡션이 들어가 있는 리히텐슈타인이 미술계를 놀라게 한 작품 스타일의 표본 작품이었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이 그림은 그의 가장 멋진 작품 중 하나라고 이야기되며 그가 이전에 만들었던 만화책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 1962년과 1964년 사이에 만들었던 전쟁을 테마로 한 작품들 중 하나였죠.

사실 그의 잘 알려진 작품들은 대부분은 만화책의 카피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림 그린들은 잭 커비(Jack Kirby)와 러스 히쓰(Russ Heath), 토니 아브러조(Tony Abruzzo), 어브 노빅(Irv Novick) 그리고 제리 그랜데네티(Jerry Grandenetti)와 같은 만화 작가의 작품들을 거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용한 이미지였죠. 리히텐슈타인 재단의 책임디렉터인 잭 코워트(Jack Cowart)는 리히텐슈타인이 카피스트(Copyist)라는 말에 “로이의 작품은 경이적인 그래픽 문법이었으며 다른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감상(sentiment)들의 집대성이었습니다. 만화그림은 크기와 색상, 처리가 다를 영향을 주기위해 바뀌었습니다. 정확한 복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그가 만화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에대해 비판적이죠. 특히 작품에서의 만화 사용이 만화를 좀 더 높은 수준의 예술로 만들기 위한 노력처럼 보이게끔 착각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만화 작가 아트 스피겔만(Art Spiegelman)은 “리히텐슈타인은 앤디 워홀이 수프에게 한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만화에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죠. 사실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매체인 만화책의 한 장면을 새로운 스타일로 그리면서 기계적인 인쇄기법을 손으로 따라 그려 대중문화와 고급예술 사이에 존재하던 위계질서를 뒤집어 놓은 것 만으로도 그 작품의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Head of Girl, 1964, Painted mannequin head, image from lichtensteinfoundation.org


BRUSHSTROKE WITH SPATTER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Brushstroke with Spatter, 1966. Oil and Magna on canvas. 121.9 x 152.4 cm (68 x 80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Art Institute of Chicago, Barbara Neff Smith and Solomon Byron Smith Purchase Fund.

리히텐슈타인은 1964년 즈음에 조각을 이용한 실험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이전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플랫한 성격과 다르게 그가 가지고 있는 형태에 대한 재능 역시 보여주게 됩니다. “소녀의 머릴 위해(For Head of Girl, 1964)”와 “붉은 그림자의 머리(Head with Red Shadow, 1965)는 도예가와 함께 작업한 작품이었지요. 리히텐슈타인은 그가 그림에서 사용하였던 그래픽 모티프들을 만들기 위해 유약(glaze)을 사용하였는데요. 3차원의 물체에 검색선과 벤데이도트를 사용함으로서 형태를 2차원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었습니다.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Alka Seltzer, 1966. Graphite and lithographic rubbing crayon pochoir, with scraping, on cream wove paper, fixed. 76.2 x 55.9 cm (30 x 22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Art Institute of Chicago, Margaret Fisher Endowment.

1966년 리히텐슈타인은 60년대 초반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모던한 회화 시리즈를 만들게 됩니다. 벤데이도트와 기하학적 형태와 선을 이용하여 친숙한 아르데코(Art Déco, 아르누보와 대비되는 공업적 생산 방식을 미술과 결합시켜 기능적이고 고전적인 직선미를 추구하는 양식) 양식의 건축구조물과 패턴 그리고 다른 모티프를 낯설게 표현하였습니다. 1967년부터 1968년 사이에 만들어진 모던 조각 시리즈 역시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에서 그 모티프를 가져왔죠.


Bedroom at Arles, from headforart.com

1960년 초반 세잔느(Cezanne), 몬드라인(Mondrian) 그리고 피카소(Picasso)의 걸작들을 재생산하기도 하였던 그는 후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아를의 반고흐의 방(Bedroom in Arles)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아를의 반고흐의 방(Bedroom at Arles)” 작품을 만드는 등 다양한 예술과 대중의 아이콘을 작품에 차용하기 위해 노력하지요.


Arctic Landscape, 1964, Oil and Magna on plexiglass, image from wikipaintings.com


THREE LANDSCAPES: A FILM INSTALLATION, image from whitney.org

1970년엔 LACMA(Los Angeles County Musuem of Art)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게 되는데요. 유니버셜 필름 스튜디오의 도움으로 자신의 1964년부터 1966년까지의 풍경 시리즈의 콜라주와 연관된 “세가지 풍경(Three Landscapes)” 이라는 영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15개의 단편 영상을 만들어 3개의 스크린 설치물에 넣게되죠.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Artist’s Studio No. 1 (Look Mickey), 1973. Oil, Magna, sand with aluminum powder and Magna medium on canvas. 243.8 x 325.1 cm (96 x 128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Collection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Gift of Judy and Kenneth Dayton and the T.B. Walker Foundation, 1981.


Entablature, © Estate of Roy Lichtenstein. Courtesy Paula Cooper Gallery, New York
Paula Cooper Gallery

1970년 그는 사우스햄튼(Southampton)에 낡은 집을 구입해 스튜디오를 만들고 남은 70년대를 그곳에서 평화롭게 지내게 되는데요. 그런 이유 때문인지 70년대와 80년대 그의 스타일은 조금씩 긴장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대신 그는 그의 이전작품을 조금씩 확장시켜 나가지요. 그가 1969년 시작한 거울 시리즈와 1970년 시작한 엔태블러처(기둥(columns) 위에 걸쳐 놓은 수평 부분으로서 위로부터 cornice, frieze, architrave의 3부분으로 됨)를 테마로한 작품 역시도 바로 이시기에 완성되었죠. 이후 71년부터 72년 사이의 작품 시리즈와 74년부터 76년 사이, 그리고 76년 출간물을 이 엔태블러처의 구성으로 만들기도 하고 “아티스트 스튜디오(Artists Studios)” 시리즈를 통해 그의 이전 작품들의 요소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요. 1973년 만든 “이것 좀 봐 미키(Look Mickey)”는 이전의 5개의 작품을 하나의 장면에 재 구성한 것으로 자신의 이전 작품의 확장이 보여지는 작품입니다.


LAOCOÖN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Laocoön, 1988. Oil and Magna on canvas. 304.8 x 259.1 cm (120 x 102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Private Collection.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Nude with Street Scene, 1995. Oil on Magna on canvas. 121.9 x 171.5 cm (48 x 67 1/2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Collection Simonyi.


Roy Lichtenstein, American (1923-1997). Landscape in Fog, 1996. Oil and Magna on canvas. 180.3 x 207.6 cm (71 x 81.75 in). © Estate of Roy Lichtenstein. Private Collection.


Barcelona Head, 1992 by Roy Lichtenstein, image from barcelonaphotoblog.com

70년대 후반 그의 스타일은 “포우 와우(Pow Wow)” 와 같은 작품처럼 더 초현실적인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가 79년부터 81년까지 만든 초현실주의 팝 작품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테마로 하기도 하고 이후 80년대에 과일, 꽃 그리고 화분과 같은 전통적인 테마를 비롯하여 다양한 모티프와 테마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90년대 들어서는 인테리어 시리즈 등을 통해 평범한 미국 환경을 표현한 작품이나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작품들에 영감을 얻은 작품들까지 다양한 테마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는 1997년 뉴욕에서 사망하기까지 그렇게 300점이 넘은 작품을 남기면서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남게 됩니다.

이처럼 20세기의 미국 예술의 아이콘으로 등장하여 수많은 창의적인 작품과 함께 많은 논쟁을 일으킨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그 명성만큼이나 높은 작품 가격으로도 유명한데요. 최근 소더비에서 거래 되었던 “잠자는 소녀(Sleeping Girl, 1964)”는 우리나라 돈으로 510억에 팔려 그의 작품이 가지는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회비판 기능을 상실했던 팝아트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게 된 것은 예술과 마케팅의 결합과 함께 신흥부자들의 자기과시욕 및 수집가, 딜러들의 경제적인 계산의 덕이 있었는데요. 리히텐슈타인이 보여주었던 ‘주제의식’이 상품으로 포장되어 소비되는 과정에서 여전히 작가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듯 합니다.

자료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Roy_Lichtenstein

http://www.huffingtonpost.com/2012/05/22/roy-lichtenstein_n_1533997.html

http://www.fastcodesign.com/1670197/a-must-see-tribute-to-pop-art-hero-roy-lichtenstei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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