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ist of the Week : Jackson Pollock
2012-05-23
Jackson Pollock, Image from artistshowdown.com
20세기 예술의 아이콘을 뽑는다면 칸딘스키, 마티스, 피카소, 뒤샹, 마그리뜨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여기 나열된 예술가들의 실제 삶을 상기시켜 본다면 어떠한가요? 아니면 떠오르는 주변의 예술가들의 삶의 특징을 생각해 본다면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들의 비범하고 극단적이고 퇴폐적이거나 불안정한 모습을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이런 예술가들의 삶을 모두 가진 예술가가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추상표현주의의 선두주자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인데요. 그는 특히 아주 은둔한 삶을 살면서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일생 동안 알콜중독과 싸워나갔던 예술가로 알려져 있지요. 모든 예술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한 삶과 기존 가치를 뒤엎는 창의력을 발산하는 예술가의 삶은 양립할 수 없나 봅니다.
Photographer Hans Namuth extensively documented Pollock’s unique painting techniques.
폴 잭슨 폴락은 1912년 1월 28일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태어났습니다. 폴락의 가족은 폴락이 만 1살이 되기 전에 코디를 떠났으며 폴락은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에서 자랐지요. 당시 가족의 농사가 잘 되지 않았던 터라 그의 아버지는 그랜드 캐니언과 사우스웨스트 지역에서 도록공사의 측량사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향은 후에 폴락의 풍경화에 드러나게 되지요.
폴락이 로스엔젤레스의 미술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자신이 어린시절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술을 더욱 더 매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두 명의 형, 찰스와 샌포드 역시도 아티스트가 되고자 했습니다. 큰 형인 찰스는 아트 스튜던트 리그의 회화작가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에게 배우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는데 형은 동생인 잭슨 폴락에게 함께 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잭슨은 1930년 형을 따라 동부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벤튼의 클래스를 듣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이름인 폴을 버리고 미들네임인 잭슨을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벤튼의 가르침으로 폴락은 고전 거장들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드로잉과 구성에 기술을 배웁니다. 그는 또한 벽화 페인팅도 공부를 하게 되는데 자신의 선생의 벽화 그림을 돕기도 하지요. 폴락의 첫번째 현대 벽화 미술 경험은 그 자신의 큰 스케일의 작업물에 영향을 크게 미칩니다.
Untitled(Self-Portrait), 1931~1935
1930년대 폴락의 작품은 벤튼의 “아메리칸 씬(American Scene)” 미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요. 자신이 좋아했던 표현주의 작가 알버트 핀캄 라이더(Albert Pinkham Ryder)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음울하고 신비스런 느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멕시칸 벽화작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Jose Clemente Orozco)의 다트머스 대학에 있는 다이나믹한 프레스코화(새로 석회를 바른 벽에 그것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것)를 본 후 그의 작품에서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초기 작품활동에서 피카소와 후안 미로 그리고 다양한 초현실주의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요. 특히 멕시코의 벽화작가 다비드 알파로 시쿠에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의 작품은 그가 에나멜 페인트를 사용하고 자연스런 효과를 내기 위해 페인트를 뿌리는 독특한 기술을 사용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주었지요.
뉴딜 정책의 노동구호프로그램(Work-Relief Programs)으로 폴락과 많은 예술가들은 아티스트로 일하면서 정부로 부터 임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부의 보호아래 폴락은 공공산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의 연방 예술 프로젝트(Federal Art Project)에 참가하여 8년간의 임금과 함께 예술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렸던 폴락의 작품 중 몇몇은 현재 유실된 상태이지만 남아 있는 작품들에서 그의 다양한 머트리얼의 사용과 폴락만의 미술언어의 구축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40년대 초반, 미국 원주민 사회에서의 얻은 모티프와 상형문자 이미지들은 그의 중요 구성요소로 나타나게 되며 이 시기부터 폴락만의 스타일이 완성되게 됩니다.
Jackson Pollock, Untitled, circa 1939-1942
폴락이 예술분야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었지만 삶에서는 아주 큰 정신적 혼란과 우울증을 겪습니다. 그는 또한 일생동안 겪었던 알콜중독과도 싸우게 되는데요. 그의 형인 찰스와 샌드(샌포드는 후에 샌드라 이름을 바꿉니다)은 뉴욕 맨하튼에서 함께 살면서 동생의 병의 치료를 위해 정신분석 등의 도움을 주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테라피조차 폴락의 알콜중독과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하였죠. 이런 그의 병들은 그의 작품에서 융 심리학 컨셉이 드러나게 만들기도 하였는데요. 1941년 후반 샌드는 찰스에게 “동생 잭슨이 만약 자신을 다잡을 수 있다면 그의 작품은 정말 대단한 것이 될 거에요. 그의 회화는 추상적이며 강렬하고 수준이 높아요”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 즈음에 폴락은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와 다른 거장들의 작품 전시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데 이 전시에 참가했던 또 다른 작가인 리 크라스너(Lee Krasner)와 후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크라스너가 폴락의 스튜디오에서 본 작품은 그의 특별한 재능을 알게 하였으며 곧 뉴욕의 영향력있는 아방가르드 엘리트들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게 됩니다. 폴락의 작품은 이 세기의 예술(Art of This Century)라는 갤러리 – 당시 가장 도전적인 미국과 유럽의 추상화가와 초현실주의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던 – 를 운영하는 페기 구겐하임의 눈에 띄게 되고 구겐하임은 폴락의 딜러와 후원자가 되어 그의 작품을 열정적인 고객들에게 소개합니다.
Male and Female, 1942, Oil on canvas
73 1/4 x 49 in. Philadelphia Museum of Art
The Moon-Woman, 1942, Oil on canvas
69 x 43 in. Peggy Guggenheim Collection, Venice
Jackson Pollock, The Moon-Woman Cuts the Circle (1943)
Oil on canvas – 43″ X 69″
Peggy Guggenheim Collection – Venice
Jackson Pollock, Blue (Moby Dick), c.1943
Gouache and ink on composition board, 18 3/4 x 23 7/8 in.
Ohara Museum of Art, Kurashiki
Jackson Pollock , Untitled [Equine III], circa 1944, Washburn Gallery
1946년 구겐하임은 폴락에게 롱 아일랜드, 이스트 햄턴의 더 스프링이라는 지역에 있는 작은 주택을 싸게 렌트해줍니다. 현재 폴락-크라스너 하우스이자 스터디 센터인 이 장소는 그의 남은 삶 내내 폴락의 보금자리였으며 그의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있는 작품의 원천지가 되었죠. 더 스프링으로 이사를 하기 전 그의 작품 속 이미지는 혼잡했고 어두웠으며 불안함과 갈등이 보여졌습니다. 하지만 더 스프링으로 옮긴 후 작품 속 색상은 밝아지고 구성은 좀 더 여유러워 졌으며 작품 속 이미지는 자연을 반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작품의 성향이 변화하고 곧 그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 – 자연스럽게 물감을 뿌리는 방법 – 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Pollock’s Studio in Springs, New York.
Eyes in the Heat, 1946, Oil on canvas
54 x 43 in.
Peggy Guggenheim Collection, Venice
Jackson Pollock, Shimmering Substance, 1946
Oil on canvas, 30 1/8 x 24 1/4 in.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사실 1936년 폴락이 처음으로 수성물감을 가지고 실험을 하였지만 10여년 동안 이것이 작품의 주된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1947년이 되어서야 겹겹이 채색된 그림이 평단의 찬사를 받게됩지요. 물론 몇몇은 그의 그림을 두고 의미없이 그려진 혼란스러운 작품이라고 하였지만 다른 이들은 매우 잘 구성되고 시각적으로 매력적이며 심리적으로 깊이가 있는 그림이라 이야기 하였지요. 폴락의 열렬한 후원자 중 한사람인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그를 “현대 미국 미술에서 가장 파워풀한 작가이며 유일하게 미술계의 거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폴락은 개인전시를 비롯한 많은 그룹 전시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949년 8월 8일엔 라이프 매거진에 실리면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되고 현 세대의 가장 중요한 회화작가로 명성을 굳히게 됩니다.
Jackson Pollock, Cathedral, 1947
Enamel and aluminum paint on canvas, 71 1/2 x 35 in.
Dallas Museum of Art
Jackson Pollock, No. 5, 1948
폴락이 자신의 가장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던 이 시기엔 사실 2년간 알콜중독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곳간 스튜디오에서 캔버스를 펼쳐놓고 한 방향이 아닌 네 방향 모두에서 미리 구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폴락은 이 기술을 “직접적인(Direct)” 그리기라고 묘사하였으며 이는 미국 인디언의 모래 그림과 연관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는 그러나 이 방법이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연스런 성장”이라고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아닌) 그 주제에 도달하는 수단”이라고 말하였지요. 주제의 성격과 내용은 그래서 늘 논란이 많이 생기며 다양한 해석을 놓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폴락의 작품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생기가 넘치는 것입니다.
Jackson Pollock, Lavender Mist: Number 1, 1950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Autumn Rhythm: Number 30, 1950, Oil on canvas, 8 ft 9 in x 17 ft 3 in (266.7 x 525.8 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1951년, 폴락의 미학은 사람과 동물의 형태에 착안한 추상적인 이미지를 거부하면서 변화가 생깁니다. 그는 이를 “당신의 무의식에서 벗어날 때 그림이 나타나게 됩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삭막한 검은색을 버리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변화에 많은 추종자들이 반대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폴락이 알콜중독에 다시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 후 5년간 그는 알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그의 작품은 조금씩 변화하면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색상은 돌아오고 제스쳐는 좀 더 풍부해 지고 다양해 졌으며, 다시 이미지는 겹겹히 숨겨졌습니다.
Jackson Pollock, Blue Poles: Number 11, 1952,
enamel and aluminum paint with glass on canvas, 82 7/8″ x 15′ 11 5/8″
The Deep, 1953, Oil and enamel on canvas, 7 ft 2 3/4 in x 59 1/8 in (220.4 x 150.2 cm)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Easter and the Totem, 1953, Oil on canvas
84 1/4 x 58 in.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그러나 1955년 폴락의 병은 결국 그의 예술능력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폴락이 작품활동을 그만둔 이후 그의 작품은 그와 별거중이었던 그의 아내, 크라스너에게 아주 많은 돈을 벌게 해 줍니다. 1956년 여름 그녀는 폴락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당시 폴락은 그를 괴롭혔던 자기 회의와 작품활동의 중단의 고통을 잊기위해 어린 정부와 집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8월 12일 아침 파리에 있던 크라스너는 폴락이 교통사고로 전날 저녁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술을 마시고 자신의 컨버터블을 운전하다 전복된 것이었죠. 이 사고로 폴락 자신을 비록하여 같이 타고 있던 지인 한명이 사망하고 또 다른 사람은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4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이 화가를 위해 1956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회고전을 개최하였습니다. 그 이후 1967년과 1998, 1999년에도 MoMA와 런던의 테이트(Tate)에서 큰 규모의 전시를 하였습니다.
또한 2000년에는 에드 해리스(Ed Harris)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폴락(Pollock)’ 이라는 영화를 통해 폴락의 일대기가 다시 그려지기도 하였지요.
폴락은 자신의 작품을 보는 이가 그의 그림에서 구상주의적인 요소를 찾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림에 이름이 아닌 숫자를 붙이기 시작하였지요. 폴락은 “(으름은) 수동적으로 그림 보게 하고 그림이 전달해야 하는 것을 받으려 하면서 그 주제의 문제나 그렇게 보여져야 하는 의미를 전해주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폴락의 아내인 크라스너는 “폴락은 그의 그림에 평범한 제목을 달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단순히 숫자를 부여합니다. 숫자는 중립적이지요. 숫자는 사람들에게 그림 자체, 순수한 그림만을 보개끔 만듭니다.” 라고 덧붙였죠.
폴락은 사후에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영국의 밴드 스톤로지즈(The Stone Roses)는 폴락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그들의 앨범 커버에 그의 작품을 많이 사용합니다.
The Stone Roses, Elephant Stone, 1988
지금까지도 폴락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늘 극단적으로 갈리는데요. 1952년 아트뉴스(ARTnews)의 한 기사에서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의 작품은 그림이 아닌 이벤트입니다. ‘그림그리기’를 그리기로 결정한 한 순간인 것이지요. 캔버스위의 제스쳐는 정치적, 미학적, 윤리적 가치로 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제스처입니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폴락을 “액션 페인터”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반면에 로버트 코트(Robert Coates)는 폴락의 작품은 “임의의 에너지가 정리되지 않고 분출된 것일뿐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없지요”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폴락의 화법은 후에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와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프랑크 스텔라(Frank Stella) 등의 작가에게 받아들여 졌으며 알랜 카프로(Allan Kaprow),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 에바 헤세(Eva Hesse) 등의 현대 작가들 역시 창작의 ‘과정’을 중시한 폴락의 정신을 그대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
http://sb.cc.stonybrook.edu/pkhouse/story/pollock1.shtml
http://www.artchive.com/artchive/P/pollock.html#images
http://www.artfortune.com/art-masterpieces/
http://en.wikipedia.org/wiki/Jackson_pollock